내년 ESG 계획, ‘곧 의무화됩니다’로는 예산이 잡히지 않습니다
9월 말에서 10월 초, 내년 사업계획을 쓰는 시기입니다. 규제 일정이 아니라 거래 상대의 요구 시한에서 거꾸로 세면 내년 예산에 넣을 항목이 달라집니다. 제조업 네 개 업종의 실제 시한을 정리했습니다.

ESG·환경 담당자에게 예산 초안을 올리는 이 시기는 대체로 비슷하게 반복됩니다.
- 작년과 거의 같은 항목을 다시 씁니다
- 작년에도 올렸고, 우선순위에서 밀렸습니다
- 지금 하지 않아도 당장 손해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 그래서 근거를 더 붙이는데, 결론은 같습니다
문제는 담당자가 규제를 몰라서가 아닙니다. 대부분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진짜 문제는 아는 것을 예산이 승인되는 언어로 바꾸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 왜 ‘곧 의무화됩니다’로는 예산이 잡히지 않나
가장 많이 쓰이는 근거부터 봅니다. 국내 지속가능성 공시 일정은 2026년 7월 확정안 기준으로 다음과 같습니다.
- 2028년연결자산 10조 원 이상 코스피 상장사
- 2029년5조 원 이상으로 확대
- 2030년2조 원 이상으로 확대
- Scope 3대상군별 3년 유예, 2031년부터 공시
이 일정대로면 상당수 제조기업은 둘 중 하나입니다. 공시 의무 대상이 아예 아니거나, 대상이어도 공급망 배출은 2031년 이후의 일입니다.
경영진이 ‘그럼 내후년에 하자’고 답하는 것은 계산이 틀려서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 논리는 예산을 만들지 못합니다. 규제 일정을 근거로 들수록, 같은 일정이 아직 멀었다는 근거로 되돌아옵니다.
🔎 실제로 움직이는 기업은 규제 때문이 아닙니다
공시 의무와 무관한데도 산정과 목표 수립에 예산을 쓰는 기업이 있습니다. 착수 계기는 규제가 아니라 거래 상대입니다.
- 거래 관계 — 고객사·원료 공급사가 계약 조건처럼 요구
- 소유·지배 관계 — 모회사·해외 본사가 그룹 목표 때문에 요구
- 평가 격차 — 경쟁사가 먼저 등급을 받아 격차가 드러남
- 자본 관계 — 인수 이후 주주·투자자가 요구
네 갈래 모두 요구자에게 자기 이유가 있고, 그 이유에는 시한이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한은 국내 공시 일정보다 앞섭니다.
계획서를 쓰기 전에 확인할 네 가지
- 상위 거래처가 감축목표를 공개했는가, Scope 3가 포함돼 있는가
- 그 목표의 연도는 언제인가
- 최근 2년 안에 배출량·제품 탄소발자국 자료 요청을 받았는가
- 그 요청은 협조였는가, 계약·입찰 서류의 일부였는가
하나라도 ‘그렇다’면, 계획서의 근거는 규제 일정이 아니라 그 거래처와 그 시한이어야 합니다.
🎯 요구자가 원하는 것은 네 가지뿐입니다
- ① 자기 감축목표의 달성 실적 — 우리 데이터 없이는 계산되지 않습니다
- ② 규제·계약 준수 증거 — 산업평균값이 아니라 실측 데이터를 요구합니다
- ③ 조달·낙찰 판단 근거 — 제출하지 못하면 평가에서 빠집니다
- ④ 거래·심사 시점의 방어 — 자료가 없다는 사실이 협상 조건이 됩니다
요구자는 우리 배출량 숫자에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 숫자를 채울 근거가 필요할 뿐입니다.
같은 ‘탄소배출량 산정’이라도 목적에 따라 산출물이 달라집니다. 예산 항목을 ‘산정’이 아니라 ‘누구에게 무엇을 제출하기 위한 산정’으로 써야 하는 이유입니다.
🏭 업종마다 요구가 굳는 지점이 다릅니다
요구자들은 각자 요구하지 않고 업계 단위로 모여 요구를 표준으로 굳힙니다. 표준화하는 지점이 업종마다 달라, 준비할 산출물의 형태도 갈립니다.
자동차 부품·소재 — 데이터를 넘기는 방식
- 현대차 — 2030년 Scope 3 63% 감축, 2025년 12월 SBTi 승인
- 현대모비스 — 2030년 Scope 3 원단위 55%, 기준연도 2019년
- 르노 — 2024년 9월부터 부품 단위 탄소발자국 공개 요구
- Catena-X — PCF 규칙서 4판 공개, BMW는 조달 절차에 등록 포함
완성차의 Scope 3 목표는 부품·소재사 데이터 없이 계산되지 않습니다. 요구가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 구조적 이유입니다.
다만 EU 제품 규제는 아직 확정 전입니다. 배터리 여권은 2027년 2월 적용으로 규정돼 있으나 산정 방법론 위임법이 발효되지 않아 개시 시점이 유동적이고, ESPR의 철강 2026년·알루미늄 2027년은 작업계획상 예상 일정이지 확정된 의무 개시일이 아닙니다.
반도체 장비·소재 — 계산 규칙
- TSMC — 2025년부터 탄소감축 실적을 공급사 선정 기준에 반영
- GREEN 협약 서명사 — 2026년 말까지 제품 탄소발자국 제3자 검증
- SEMI SCC — 산정 지침 공개(구매 2024년, 판매 제품 사용 2025년)
팹이 묻는 것은 회사 단위 배출량이 아니라 제품 단위 데이터입니다. 규칙이 공개된 뒤에는 방법론이 없어서 못 한다는 설명이 통하지 않습니다.
제약 — 요구 시점
구매사들이 공동으로 같은 시한을 제시한 드문 사례입니다. 2025년 11월, SMI 헬스시스템 태스크포스 9개사의 최고구매책임자가 공급사에 보낸 공개서한입니다.
- 2027년제3자 검증을 받은 과학기반 감축목표 공개
- 2028년Scope 1·2·3 공시와 상위 10개 제품 PCF 또는 LCA
- 2030년재생전력 80%, 공정열 배출 20% 감축
서명사에 삼성바이오로직스가 포함돼 국내 공급망에 직접 닿습니다. 아스트라제네카는 연 거래액 25만 달러를 넘는 공급사에 이 요건을 계약에 반영하고, 참여하지 않으면 우선공급사 목록에서 제외될 수 있다고 안내합니다.
전선·전력기자재 — 결과물의 형식
- TenneT — 해상풍력 계통연계 조달에서 LCA와 환경비용지표(ECI)로 평가
- ECI — EPD의 19개 환경영향을 하나의 금액으로 환산(EN 15804)
단위가 금액이라 환경영향이 입찰 평가에 비용으로 더해집니다. 제품 가격이 더 싸도 총점에서 순위가 뒤집힐 수 있습니다. 필요한 산출물은 회사 단위 보고서가 아니라 제품별 EPD입니다.
EU 건설제품규정도 2026년 1월부터 성능선언에 지구온난화지수를 포함하도록 바뀌고 있습니다. 다만 제품군별 조화표준 일정에 따라 단계적이어서, 개별 품목의 적용 시점은 확인이 필요합니다.
잡은 지점은 다릅니다. 자동차는 전달 방식, 반도체는 계산 규칙, 제약은 요구 시점, 전선·전력기자재는 결과물 형식. 그러나 도착지는 같습니다. 탄소값이 가격과 거래 자격의 일부가 되는 시장입니다.
🗓 시한에서 거꾸로 세면 내년에 무엇이 들어가야 하나
배출 데이터는 지나간 기간을 나중에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전력·연료 사용량, 구매 실적 같은 활동자료는 그 기간에 기록돼 있어야 산정할 수 있습니다. 감축 실적은 기준연도 대비로 말하므로 기준연도를 확정하고 최소 한두 개 이행연도가 쌓여야 합니다. 목표 검증에도 시간이 듭니다.
이 소요 기간을 앞의 시한에 대입하면 착수 시점이 나옵니다.
- 2026년 말 PCF 제3자 검증남은 여유가 거의 없습니다
- 2027년 목표 공개2026년 안에 인벤토리를 끝내야 합니다
- 2028년 제품 PCF2026~2027년에 제품별 수집 체계가 필요합니다
- 유럽 입찰 EPD수집·산정·검증이 순차라 병렬 처리가 어렵습니다
내년 예산에 넣을 항목은 ‘공시 대응’이 아니라 ‘기준연도 확정과 데이터 수집 체계’입니다.
공시 대응은 시점이 오면 하는 일이고, 기준연도와 수집 체계는 그 전에 해 두지 않으면 그 시점에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예산 심의에서 설득력이 갈리는 지점입니다.
⚠️ 계획서에 쓰면 오히려 역풍인 문장
- ‘곧 의무화됩니다’ — 일정을 아는 임원 한 명이면 무너집니다
- ‘ESG를 하면 기업가치가 오릅니다’ — 거래 데이터로 뒷받침하기 어렵습니다
- ‘EU 규제 때문에 반드시 요구받습니다’ — 품목 단위로 짚지 않으면 반박당합니다
- ‘경쟁사도 다 합니다’ — 확인되지 않은 일반화는 신뢰를 깎습니다
- ‘일단 산정부터 하겠습니다’ — 제출처와 시한이 없으면 비용 항목으로만 보입니다
대신 쓸 문장은 하나입니다. 어느 거래처가 언제까지 무엇을 요구하는가. 검증 가능하고 반박하기 어렵습니다. 확정되지 않은 규제는 확정되지 않았다고 쓰는 편이 오히려 신뢰를 얻습니다.
✅ 같은 예산을 다르게 쓰는 법
- 이전 — 지속가능성 공시 의무화에 대비해 온실가스 배출량 산정 체계를 구축하고자 함
- 이후 — 상위 거래처가 2027년까지 공급사 감축목표 공개를 요구함에 따라, 2026년 중 Scope 1·2·3 인벤토리를 완료하고 기준연도를 확정하고자 함
차이는 세 가지입니다. 요구하는 주체가 있고, 시한이 있고, 지금 하지 않으면 그 시점에 할 수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계획서를 쓰기 전에, 우리 회사에 누가 무엇을 언제까지 요구하고 있는지부터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목록이 곧 계획서의 목차가 됩니다.
👉 어떤 요구가 들어와 있는지, 그 시한에서 역산하면 내년에 무엇부터 해야 하는지 판단하기 어렵다면 거래처 요구 현황과 보유 데이터 수준부터 점검해 보세요.
*본 글은 2026년 9월 기준으로 공개된 규제·구매정책 자료를 정리한 것이며, 탄소중립연구원이 수행한 특정 기업의 프로젝트 사례가 아닙니다. 인용한 제도 중 일부는 입법·위임법 절차가 진행 중이어서 최종 적용 시점과 범위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개별 기업의 적용 여부는 제품·거래처·계약 조건에 따라 별도 확인이 필요합니다.
공식 출처
- 금융위원회 지속가능성 공시 제도화 방안 최종안 관련 보도 (이투데이)
- 지속가능성 공시 로드맵(안) 해설 (김·장 법률사무소)
- SMI 헬스시스템 태스크포스 CPO 공개서한 (2025-11-21, PDF)
- 아스트라제네카 공급사 지속가능성 가이드 2026 (PDF)
- TSMC ESG — 탄소감축 실적의 공급사 선정 기준 반영
- SEMI 반도체기후컨소시엄(SCC) Scope 3 Category 11 산정 지침
- 현대차·기아 SBTi 감축목표 승인 보도 (한국일보)
- 현대모비스 SBTi 감축목표 승인 (현대자동차그룹 뉴스룸)
- 르노그룹 — 공급사 탈탄소 요건
- Catena-X Product Carbon Footprint Rulebook v4 (PDF)
- CIGRE — TenneT의 LCA·환경비용지표(ECI) 조달 적용
- EU 건설제품규정 (EU) 2024/3110 (EUR-Lex)
- SBTi 목표 검증 절차 안내